○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염흥방(廉興邦)이 우에게 현상금을 걸고 급히 조반(趙?)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도록 권하였다. 정자교(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上萬戶)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ㆍ부만호 도길부ㆍ이광보(李光甫)ㆍ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이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함께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모질게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李光)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흥방은 기어이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적인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고, 너는 나와 서로 송사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흥방은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 그 입을 치게 하였다. 복해는 졸면서 듣지 못하는 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좌사의 김약채(金若采)만이 불가하다 하여 고문을 그치게 하였다.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한 것이었다. 이날 흥방은 다시 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이르러 옥간과 대간을 청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임오일에 우(禑)가 반과 그 어미와 아내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의약(醫藥)과 갖옷[?]을 주고, 영을 내리기를,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우선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 나누어 주라."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은 명철하시다." 하였다. ○ 계미일에 우가 최영과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사자가 견미에 집에 이르니, 견미는 명을 거역하고 노한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마다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의 도리인가. 옛날부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신하가 있다."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달려가 그 무리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을 탄 갑사(甲士)들이 이미 길을 막아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의 집이 남산(男山)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騎兵)이 이미 대열을 이루었다. 견미는 매우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는데 탄식하기를, "광평군(廣平君)이 나를 그르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견미의 흥방이 최영이 맑고 정직하며, 또 중요한 병권을 쥐고 있음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가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知門下)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林?)는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내고, 찬성사 왕복해는 성(姓)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 을유일에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대사헌 염정수(廉廷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ㆍ복해ㆍ치(치)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병술일에 흥방ㆍ견미ㆍ길부ㆍ성림ㆍ정수ㆍ복해ㆍ영진ㆍ치를 처형하고, 또 그 족당(族黨) 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판개성(判開城) 임제미(林齊味), 밀직 홍징(洪徵)ㆍ임헌(任憲)ㆍ박인귀(朴仁貴)ㆍ반덕해(潘德海)ㆍ이희번(李希蕃), 개성 윤 정각(鄭慤), 전법판서 이송(李?),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우사의 신권(辛權),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집의 이미생(李美生), 좌랑 홍상연(洪尙淵),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이에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존성은 인임의 종손으로 처음에는 인임의 하는 짓을 본받았으나 뒤에는 자못 뉘우쳤다. 서경 윤(西京尹)으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제일이어서 백성들이 추모(追慕)하였다. 임헌은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으므로 옥관이 면죄시키려 하였으나, 영이 임헌이 흥방의 세력을 빙자하여 대사헌이 되어도 곧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베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만흥은 견미의 가신(家臣)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간사하고 교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다. 과거에 인임이 정권을 잡으려고 꾀하여 신우를 세우니, 한 나라의 권세가 그 손아귀 안에 있었고, 그 도당들이 이리저리 엉켰는데 견미는 그 심복이 되었다. 문신들을 미워하여 추방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흥방도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뒤에 견미는 흥방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흥방도 역시 전날 귀양갔던 것을 징계하여 몸을 보존하려고 꾀하여 오직 인임과 견미의 말만을 좇았다. 이에 흥방의 동모형(同母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侍中)으로 삼으니 권간(權奸)의 도당이 양부(兩府)에 깔려 있고, 안팎의 요직은 그들의 사당(私黨) 아닌 것이 없어서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전토를 빼앗아 산과 들을 모두 점령하며, 남의 노비를 뺏은 것이 천 백으로 떼를 이루었으니, 주현(州縣)ㆍ진역(津驛)ㆍ능침(陵寢)ㆍ궁고(宮庫)의 밭이 모두 침탈을 당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세(賦稅)를 도피한 백성들이 저자같이 모여 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이산하고, 도적은 성하여 공(公)과 사(私)의 재물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들의 행위에 분격하여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제거하니, 국인(國人)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우현보ㆍ윤진ㆍ안종원을 문하찬성사로, 문달한(文達漢)ㆍ송광미(宋光美)ㆍ안소(安沼)를 문하평리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으로, 왕흥을 지문하사로,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 밀직사사 조임(趙琳)을 남경에 보내어 조회를 청하기로 하였는데, 조임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계사일에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전 법판서 김을정(金乙鼎), 대호군 김함(金涵)ㆍ신정(辛靖), 성균좨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사헌장령 김조(金肇), 호군 최지(崔遲)ㆍ임맹양(林孟陽), 사복정 감성단(甘成旦), 전 강릉 부사 도희경(都希慶), 환자 조원길(趙元吉) 등 50여 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族黨)이었다. ○ 갑오일에 비로소 백관의 녹을 주었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견미의 무리가 빼앗아 점유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고, 안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견미 등의 가신과 사나운 종을 잡아서 무려 천여 명이나 베고, 재산도 모두 몰수하였다. 성림의 당인 서규(徐規)가 이천(利川)에 있었는데, 안집(安集)ㆍ이안생(李安生)이 잡으려 하니, 규가 도망갔다. 안생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침내 간통한 뒤에 그의 아내를 시켜 규를 유인하여 오게 하고, 안생이 잡아 죽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안생을 베고, 그 아내는 전객시(典客寺)에 붙여서 종으로 만들었다. ○ 종실(宗室)ㆍ기로(耆老)ㆍ대간(臺諫)ㆍ육조(六曹)를 시켜 문무(文武)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 이인민(李仁敏)을 계림부(?林府)에 귀양보내어 봉화대(烽火臺) 군사에 배치하고, 대호군 이환(李?)과 진사 도유(都兪)를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인임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각 자신을 특별히 후대한다고 여겼다. 충성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고양이[李猫]에 비유하였다. 최영은 인임이 자기를 두둔하여 준 것을 은덕으로 생각하여 우에게 아뢰기를 "인임이 계책을 결정하고 대국을 섬기어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하였다. 국인(國人)이 탄식하기를, "임(林)ㆍ염(廉)의 옥사에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환(?)은 인임의 얼자(?子)인데 임견미의 사위였으며, 유(兪)는 도길부의 아들로서 우인열(禹仁烈)의 사위였다. 최영은 본래 인열과 친하였으므로 유도 죽음을 면하였다. 또 전 찬성사 박형(朴形)을 각산수(角山戍)로, 지신사 권집경(權執經)을 안동(安東)으로, 우대언 이직(李稷)을 전주로 귀양보냈다. 형은 중용의 아비이고, 집경은 인임의 첩의 사위이며, 직은 인민(仁敏)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이인복(李仁復)이 인임과 인민의 사람됨이 미워서 말하기를, "나라를 결딴내고 집안을 망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아우다." 하였는데, 그 손자 존성(存性)이 과연 연좌되었다. ○ 2월에 우가 견미ㆍ흥방 등의 악기를 화원에서 점검하니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로,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이날 우리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들어갔다. 영이 임견미ㆍ염흥방이 쓴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ㆍ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이니, 이제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질 뿐이다. 어찌 그 과거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동강에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음악을 연주하며, 유숙하고는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주고, 또 기생 15명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다.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 설장수(?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고려가 짐의 약속을 듣기를 원하므로 해마다 말을 조공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아무데도 소용이 없고, 또 어렵다고 호소하므로 내가 명령하기를 세공(歲貢)은 하지 말고 3년에 종마(種馬) 50필씩만 바치라 하였는데, 가져온 말이 또 소용이 없어서 뒤에 5천 필을 사왔으며, 또 모두 약하고 작아서 우리 말 한 필 값이면 그 말 두세 마리는 살 수 있었고, 지금 또 의관(衣冠)을 고친 사례로 말을 가져왔는데, 발굽이 거칠고, 엉덩이 살만 풍만하였다. 기왕 바치는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반드시 사신이 오다가 서경(西京)에 이르러 팔아 바꿔서 온 것이다. 이미 장자온을 금의위(錦衣衛)에 가두었으니, 해가 지난 뒤에 죄를 주겠다. 네가 돌아가서 집정 대신에게 고하라. 짐이 이미 통상을 허락하였는데, 그대들 편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증명서를 가지고 와서 무역하게 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대창(大倉)에 와서,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지 배를 만들고 있는지를 엿보고, 가서 소식을 알려주는 우리편 사람에게 중한 상을 주니, 이것은 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소견이다. 지금부터는 조심하여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고, 또 사신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 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황제가 또 약재를 주었다. ○ 여러 도의 양반ㆍ백성ㆍ향리(鄕吏)ㆍ역리(驛吏)의 적(籍)을 만들어 군대로 삼아 일이 없으면 농사에 힘쓰고 일이 있으면 징발하게 하였다. ○ 5도의 성을 수축하라 명하고, 여러 원수를 서북의 변방에 보내어 불의의 변에 방비하게 하였다. ○ 최영이 백관을 모아서 철령 이북을 명 나라에바칠 것인가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였다. ○ 우가 최영과 함께 비밀리에 요동을 치기를 의논하였다. ○ 경성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였다. ○ 원주 목사 서신(徐信)을 베었는데, 이성림의 동서였다. 우리 태조가 사람을 시켜 최영에게 말하기를, "죄의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한 무리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지금부터는 형벌과 살육을 그치고 포용하는 명을 반포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복해(福海)의 준마(駿馬)를 가져다 타며 이르기를, "잘 놀라지는 않는가." 하였다. 판도판서 송빈(宋贇)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복해도 부리기 어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적의 말을 취했다고 그러느냐." 하고, 마침내 죽였다. ○ 순군(巡軍)이 견미ㆍ익순ㆍ흥방ㆍ길부의 아내를 고문하고 재산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여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성림ㆍ복해ㆍ존성ㆍ영진ㆍ임치ㆍ신권ㆍ손중흥 등의 처를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이에 처형당한 자의 자손을 빠짐없이 잡아 죽였는데, 포대기 속에 있는 어린 것까지 모두 강에 던지니, 숨어서 면한 자가 거의 없었고, 그 아내와 딸로 관비(官婢)에 몰입(沒入)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 정당문학 곽추(郭樞)를 남경에 보내어 약재를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은 철령 이북을 돌려 주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우가 호곶(壺串)에 있어 기린선(麒麟船)ㆍ봉천선 등의 배를 타고 갖은 잡된 놀이를 하였다. 칼을 잡고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배 가운데 앉아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이르기를, "부왕(父王)께서 밤에 자다가 시해되었으니 내가 이를 매우 경계한다." 하였다. ○ 우가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가 최영의 딸을 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영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뢰기를, "신의 딸이 못생겼고, 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측실(側室)에 두고 있으니 지존(至尊)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 부하 정승가(鄭承可)ㆍ안소(安沼) 등이 우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영의 뜻을 꺾었다. 이날 우가 상의(尙衣)에서 옷을 늦게 바쳤다 하여 별감 강의(康義)와 원윤해(元允海)를 베었다. ○ 전 전리판서 허금(許錦)이 졸하였다. 허금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털어 약을 지어 병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친히 가서 문병하고 약을 주어서 살린 것이 대단히 많았다. 불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 연안(延安) 부사 유극서(柳克恕)와 환자 김실(金實)을 베었다. 극서는 견미의 문객인데, 또 이존성의 말을 듣고 몰래 김실을 옥에서 도망가게 하였었다. ○ 최씨를 봉하여 영비(寧妃)로, 또 신아(申雅)의 딸을 봉하여 정비(正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삼았다. 이근비(李謹妃)로부터 이하 최영비(崔寧妃)ㆍ노의비(盧毅妃)ㆍ최숙비(崔淑妃)ㆍ강안비(姜安妃)ㆍ신정비(申正妃)ㆍ조덕비(趙德妃)ㆍ왕선비(王善妃)ㆍ안현비(安賢妃)와 소매향ㆍ연쌍비ㆍ칠점선(七點仙) 등 세 옹주(翁主)의 여러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은 창고가 모두 비었으므로 미리 3년 동안의 공세(貢稅)를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여 또 가외로 더 거두니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 ○ 첨서밀직 하륜(河崙)을 양주(襄州)로,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을 순천(順天)으로, 첨서밀직 이숭인(李崇仁)을 통주(通州)로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는데, 인임의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 공산(公山)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이 우에게 권하여 요동을 치려 하니, 자송이 영의 집에 가서 불가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영이 그를 견미와 당(黨)을 지어 붙었다 하여 곤장 1백 7대를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귀양보내기로 하였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자송이 청렴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정승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죽자 듣는 사람들이 슬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에게 나아가서,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을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 경자일에 우가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ㆍ경상도는 왜적의 소굴이 되고, 서북면은 땅이 분할되어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경기ㆍ교주ㆍ양광도는 성을 수축하기에 피곤하고, 서해도와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기에 지쳤는데, 게다가 군사를 징발하니, 8도가 소요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안팎에서 원망하였다.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이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말하기를, "그리하겠소." 하였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날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자,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성취하려거든 대가를 서경(西京)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려 군사를 내면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 대군의 양식을 충족할 수 있으니,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으니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 정미일에 우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촉하고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데에 대호군 배구(裵矩)에게 감독하게 하고, 임견미ㆍ염흥방 등의 가재를 배로 서경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賞)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朴?),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林)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ㆍ안경(安慶)ㆍ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고, 심부름꾼이 1만 1천 6백 명이었다. ○ 정사일에 우가 봉천선(奉天船) 도원수 동지밀직 이광보(李光甫)에게 명하여 돌아가 개경(開京)과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 ○ 경신일에 우가 대동강에 가서 온갖 놀이를 베풀고, 온종일 호악(胡樂)을 연주하였다. 순군만호부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하여 군사 10명을 놓아주었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리었다. ○ 신유일에 좌우군도통사가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우가 술에 취하여 날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하지 못하였다. 우는 술이 깨자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여러 원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과 갑주(甲?)와 궁검(弓劍)과 말을 차등 있게 주고는 새벽까지 호악을 연주하였다. ○ 임술일에 조민수는 좌군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는 우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면서 군사를 10만이라 군호(軍號)하였다. 계해일에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서 만일 한 달간이나 지체한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굳이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 갑자일에 우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胡樂)을 울리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말 먹이는 사람이 벌벗고 강에서 말을 씻기니, 우가 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여 베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동강에 가서 즐기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을축일에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호복(胡服)을 입게 하였다. ○ 왜적이 초도(椒島)에 들어왔다. 이때 경성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오직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오르는데 경성이 텅 비었으니,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으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우가 사냥하려고 나가면서 말 한 필을 끌어내어 베며 이르기를, "이 말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였다. 또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 2명을 보고 즉시 명하여 베었다. 우의 음란과 살육이 날로 심해졌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문달한ㆍ김종연(金宗衍)ㆍ정승가와 환자(宦者) 조순(曹恂)ㆍ김완(金完)을 보내어 좌우도통사와 여러 장수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주고, 도진무(都鎭撫)에게는 모두 옷을 주도록 하였다. ○ 5월 1일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기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는 나가 놀 때마다 호악을 연주하고, 광대를 시켜서 갖은 놀이를 벌였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며 피리를 불었다. 왕과 신하가 음란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 왜선 80여 척이 와서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 고을을 침범하였다. 우가 상호군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ㆍ양광도로 보내어 병을 핑계대고 북쪽 정벌에 나가지 않거나, 자제와 노예로 대행시킨 자는 모두 왜적을 막게 하고, 피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게 하였다. ○ 우가 영비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을 쏘기도 하고, 격구를 하기도 하다가, 말 기르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최영이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당신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금하는가."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좌우에 눈짓하여 마침내 말 기르는 사람을 베었다. ○ 경진일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가 곳곳에서 베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 최영이 우에게 청하기를, "전하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노신이 여기서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 갑신일에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 ○ 이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江界) 원수 이억(李?)이 먼저 요동 지경에 들어가서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었다. ○ 병술일에 좌우군 도통사가 아뢰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첫째 여울에서 휩쓸려서 빠진 자가 수백 명이요,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러 둔을 치는 것은 한갓 양식을 허비할 뿐입니다. 여기서 요동성에 이르는 사이에 큰 내가 많아서 무사히 건널 것 같지 않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 박순(朴淳)에게 부쳐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어찌 감히 부월(?鉞)을 피하여 묵묵히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인데, 우리 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부지런히 대국을 섬겼고, 현릉(玄陵)께서 대명(大明)에 복종하고 섬겨 그 표문에 이르기를, 자손 만대가 되도록 길이 신첩(臣妾)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서 해마다 조공 바치는 물건을 한결같이 조서대로 하니, 이에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주며 전하의 작위를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이요, 전하의 거룩한 덕입니다. 이제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衛)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계책인데,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는 것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덥고 장마가 져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함께 지쳤으니, 몰아서 견고한 성 밑에 다다르면 싸워도 반드시 이기지 못 하고 쳐도 반드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고 진퇴가 곤란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을 명령하여 삼한 백성의 기대에 맞추소서." 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않고 환자 김완(金完)을 보내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군중에서 완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최영이 오랑캐 군사와 함께 요동을 협공하려고 배후(裵厚)를 원 나라에 보냈다. 그때 망한 원 나라의 남은 종자는 사막으로 도망가 헛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허술하기가 이와 같았다. ○ 양광도 안렴사 전리(田理)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도내 40여 군을 침범하였는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적고 약하여 사람 없는 지역을 밟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 도흥(都興) ? 김주(金湊) ? 조준(趙浚) ? 곽선(郭璇) ? 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어 막고, 한양에 있는 여러 비(妃)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홍인계(洪仁桂) ?∼1390(공양왕 2) 고려의 무신. 본관은 남양. 1365년(공민왕 14) 신돈(辛旽)이 최영(崔瑩) 등 구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할 때 판사(判事)로서 구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순흥(順興)에 유배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 원수(元帥) 지용수(池龍壽)를 따라 비장(裨將)으로서 요성(遼城)을 쳐 공을 세웠다. 1377년(우왕 3)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서 신평현(新平縣)의 왜구(倭寇)를 쳤고, 1380년 강계 원수(江界元帥)가 되어 왜구를 격파했으며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는 이성 원수(泥城元帥)로서 종군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혀 옥사(獄死)했다.
바로 위 분은 밀직공 이억과 함께 요동 정벌에 선봉으로 나선 홍인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밀직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단, 최근에 고려숭의회에서 제작한 여말충의열전이라는 책에는 밀직공이 나와 있습니다. 원수공 李疑로요.) 이 것을 볼 때, 밀직공을 비롯한 유명한 선조들은 몇 분 정도는, 매체나 서적, 또는 사전 종류가 나올 때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